신부님 말씀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지하철에서 한 장님거지가 동냥 통을 앞에 놓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중년 신사 한 사람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 뒤로 예쁘게 차려 입은 숙녀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다가 거지를 보고는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통에 던져 놓고 갔습니다.

이제 이 둘 중에서 누가 더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준 숙녀 한 사람의 행동이 더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생각이 이러했다면 어떨까요?

먼저 적선을 하지 않은 신사가 ‘지금 돈 몇 푼을 저 거지에게 주는 것은 쉽지만, 이런 동정으로 그가 계속 타성에 젖어 거지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라는 안쓰러움을 꾹 참고서 그냥 지나갔다면, 그것이 과연 잘못된 행동일까요?

또 예쁜 숙녀가 거지를 보고 맵시 있는 자태로 지갑을 열어 우아하게 돈을 꺼냈고 혹시 더러운 동냥 통에 손이 닿을까봐 멀리서 던져 놓고서는, 적선했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고상한 걸음걸이로 걸어갔다면 과연 그녀의 행동이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보았을 때에는 예쁜 숙녀가 더 사랑을 실천한 것 같지만, 속 내용까지 보았을 때는 분명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판단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머물러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앞서 거지에게 보였던 겉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참된 사랑이 우러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과 대치하는 유다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연상하게끔 하려는 것인지 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했다는 과격한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아무튼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지금의 모습만을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라해 보이는 예수님의 겉모습, 또한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의 신분. 바로 그러한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 그것은 전부가 결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마치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그런 마음을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서야 우리들은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보살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