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열심히 성당을 다니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 나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가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그는 기도 중에 주님께 이렇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주님,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까?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이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들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당신은 정녕 모르시는 것입니까? 왜 당신은 이렇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으십니까?”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님의 겸허한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거기에 보내지 않았느냐!”
주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죄 많이 지으라고?
하느님 나라에서 할 일이 없어서 대충 시간 때우고 오라고 보내셨을까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이 세상에서 고생이나 신나게 하고 오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지금 나를 바로 이 자리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뜻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정답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십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 근처의 동네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결국 베타니아로 떠난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반대하여 제거하려는 유다 지도자들이 가득한 곳으로,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곧 죽음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라자로는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가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무르다 라자로가 있는 베타니아로 떠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때, 예수님께서 통보받았을 때에는 이미 라자라고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랍비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자기 육체 근처에서 계속 머물다가 나흘 째 되는 날에 비로소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또한 나흘이라는 숫자는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활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이미 늦었는데,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담겨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십니다.
그 결과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 수 있게 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희망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도록 한다면, 우리도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부활하여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순 제5주일.
이제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섰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부합되게 살았는지를 반성하면서, 예수님의 사랑 실천에 함께 동참하는 우리들이 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친절 한 가지를 베풀어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