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말씀

파스카 성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시신이 되어 무덤 속에 계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십자가 이전의 예수님과 십자가 이후의 예수님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바칠 때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나와 부활한 내가 같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차원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지금의 삶과 부활 후의 삶은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는 것이 힘들어도……“지금”의 삶을 포기한다면, 나중의 삶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십자가라는 징검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려면 죽음의 바다를 지나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너무 힘들어서 포기한다면 부활과 부활 후의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사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드니까 그냥 죽어버리자, 죽어버리면 나중에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겠지……”

천만에… 그럴 일 없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윤회를 믿지 않습니다.

부활은 윤회가 아니고, 환생도 아닙니다.

지금의 삶의 결과가 부활로 이어질 뿐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부활할 수 있을까요?

숨이 끊어지기 전에 회개를 했다면 또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는 영원한 죽음,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살기를 바란다면 지금의 삶을 견디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삶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라는 고난의 길을 가셨고, 죽음을 건너 가셨습니다.

죽은 다음의 우리가 아니라 지금 살아 있는 우리를 위해서…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우리는 지금 살아 있을 때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죽은 다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금입니다.

행복해야 할 의무…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 수난을 겪으신 예수님께 드리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도 당신처럼 죽을 고생만 하다가 죽어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각자의 십자가를 참고 견디면서 당신의 수난으로 마련하신 생명과 행복을 얻어가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돌아가신 부모에게도 효도를 다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정상적인 생활을 팽개치고 “시묘”를 한다면서 평생 부모의 무덤을 떠나지 않고 울기만 한다면 어느 부모가 그것을 효도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정말 효도한다면 부모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성금요일은 일 년에 하루로 충분합니다.

우리 교회는 매 주일마다 부활을 경축합니다.

사실은 매일 미사 때마다 부활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죽는 것은 내가 했다, 너희는 살아라.”

“눈물은 내가 흘렸다, 너희는 웃어라.”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스스로 삶을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나중에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포기하면 나중의 생명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