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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임헌우, ‘좋은 글’ 중에서)

지우개 (임헌우, ‘좋은 글’ 중에서)

 

나의 하루를 채 쓰기도 전에

지워야 할 것들이 많아 힘들었지

하루 치의 이기심,

또 그만큼의 자존심과

다른 이에 상처를 준 많은 단어들

온전히 지우고 다시 써내려 갈 수 있다면

내 몸이 닳아 없어져도 행복하겠지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억지로 지워내다

때론 찢어지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겠지만

 

아문 상처 사이로 새살이 돋아나듯

내 남루한 기억들을 걷어내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하루를 잘 써 내려가는 일보다

하루를 잘 지워내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을 깨닫는 날

 

지우개 똥보다 못한 욕심 때문에

난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썼던가

 

빼곡이 채워진 성급함보다

텅 빈 여백의 쓸쓸함을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욕심 없이 버려야 한다.

깨끗하게 지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