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낮 미사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지금은 핸드폰이 있어서 오래된 전화번호는 삭제하면 끝납니다.
근데 옛날에는 오래된 수첩을 정리했습니다.
사람들의 연락처를 새 수첩에 열심히 옮겨 적었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옮겨 적어지지 않는 번호들이 있더군요.
그래도 한 때는 얼굴을 마주 보며 진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만날 수가 없어서 옮겨 적을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전에 좋아하고 사랑했던 장소 역시 이제는 그곳에 갈 일이 없다는 생각에 그 이름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옮겨 적지 않는다고 그 사람과 장소에 대한 기억도 완전히 사라질까요?
아니지요.
비록 이름을 옮겨 적지는 않았어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 또는 어떤 물건이나 장소를 통해서도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마치 수첩을 정리하면서 이제는 잊겠다고 이름을 옮겨 적지 않는 것처럼, 종종 주님을 잊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시는 분이라고, 나와는 관계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글로 옮겨 적지 않는다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주님에 대한 기억 역시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완전히 떠날 수 없으며, 자신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장면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평생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낳은 그의 부모 역시 주님의 뜻을 받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었습니다.
바로 그 장면이 오늘 복음에 드러나지요.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선택합니다.
사실 즈카르야는 처음에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고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주님의 뜻을 지우려 했습니다.
그 결과 벙어리로 살게 되었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고 기억까지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절대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야 즈카르야가 입이 풀려서 주님을 찬미했던 것처럼, 보다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행복의 문에 이르는 열쇠 (박성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중에서)
미국의 인기 뉴스를 진행했던 에이비드 브린클린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가끔씩 사람들에게 빵 대신에 돌멩이를 던지곤 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원망하여 걷어차 버리다 발가락 하나가 부러지고, 왜 어떤 사람은 그 돌을 주춧돌로 만들어 집을 짓는지.”
가끔씩 이해할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비를 맞고 한 사람은 옷을 버린다고 투정하는데 왜 다른 한 사람은 무지개를 떠올리며 웃음짓는지를…….
같은 사물, 같은 세상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
혹시 그것이 세상을 앞서간 사람들이 말하곤 하는 행복의 문에 이르게 하는 열쇠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