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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로 배우는 교리] 그날의 ‘시국 담화문’

 

 

1980년 5월 18일, 서울주보2면에 특별한 담화문이 실렸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시국 담화문’. 주교단은 당시 시국에 대한 큰 우려와 함께 천주교의  분명한 입장을 5항에 걸쳐서 밝혔습니다. 특히 정부가 공약한 민주 헌정 확립과 평화적정권 이양을 조속히 시행할 것을 단호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시국 담화문 1항). 만약 이 공약이 이행되지 않으면 국민적 단합이 깨지고 정국의 혼란과 국가 안보의 기틀마저 흔들릴 것이라는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이 담화문의 깊은 우려는 그날 바로 비극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신군부가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대신학생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할 정도로 당시의 시국은 위기였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남녀 대학생들의 시위 물결이 휩쓸고 있었습니다. 5월 내내 시위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주로 ‘전두환 퇴진’,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개정’을 외쳤습니다. 시위 대학생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매일 늘어나자 경찰들은 중앙청, 청와대, 시청 등 중요 장소들을 지키면서도 최루탄을 쏘는 등 강경 진압을 계속했습니다. 5월 14일, 대신학생들은 시국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는데, 당시 맨 앞줄에서는 경찰의 무차별 진압으로 피를 흘리는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5월 15일에는 약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중심으로 모였지만, 대학생 대표들이 군대에 의한 유혈사태를 걱정하여 자진해서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입니다. 당시의 시국상황을 한번 살펴보면, 1980년 5월부터 신군부의 정치 관여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학생 시위가 대대적으로 발생했습니다. 5월17일 24시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전국의 주요 시내와 대학, 중요기관들에 계엄군 병력이 배치됐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18일 주일날에도 시위를 계속했고 계엄군은 초기부터 무자비한 강경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결국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부상자도 수천 명이 발생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가장 아픈 역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서울주보 곳곳에도 이런 아픈 역사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시국 담화문’은

서울주보 역사에서도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1978년에 시작되어 당시 만 2년이 된 서울주보는 단순히 전례지, 교회 소식지를 넘어서 국가와 사회에 대해 정의와 인간 존엄에 관한 교회의 메시지를 내는 매체로서의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신군부에 의한 언론의 탄압이 심한 상황에서 교회의 분명한 의지 표명은 서울주보의 여정에 한 단계 발전하는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