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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대건.최양업 신부님 탄생-2

세 소년은 1836년 12월 2일 장상에 대한 순명 서약을 한 다음날 출발하여 6개월을 걸어서 마카오에 도착했습니다. 한겨울 가장 추운 시기에 압록강을 걸어 국경을 넘었고, 무더운 여름을 향해 갈 무렵 6월 7일에 열대기후인 마카오에 도착한 것입니다. 세 소년은 첫 시작부터 전 세계의 기후 변화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후에 김대건에게는 변문과 훈춘, 서해바다를 건너는 용덕(勇德) 은총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신부격인 모방 신부는 조선 신학생들을 부탁하며 추천서를 보냈습니다. “조선 소년 두 명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또 기회가 없을까 걱정이 되어 비록 저하고 4~5개월 밖에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세 번째 소년을 추가로 같이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세 번째 소년이 김대건입니다.
마카오 본부에서는 조선 신학생을 위한 별도의 학교를 세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본부에 임시 학교를 세워 대기하던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방식으로 교육하기로 했습니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럽어와 서양철학과 신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김대건은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칼르리 신부는 교장으로 추천받아 최고 품질의 연필 3다스, 자명종, 풍금 등을 파리에 있는 신학교 신부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세 소년은 잘 갖추어지지 않은 임시학교에서 서양식 교육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마카오는 말라리아 풍토병이 있는 지역입니다. 첫해 11월 27일 조금씩 학업과 생활에 적응할 무렵, 최방제 신학생이 위열병으로 선종하였습니다. 칼르리 교장 신부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소년의 병자성사 이야기를 전합니다.

 

“세 명 중에서 믿음이 더 강했고 신심이 더 깊었고,

앞으로 이 어린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촉망되던 학생이 꽃다운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

그가 라틴어 공부에서 보인 진전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식사 동안 그는 성경을 알아듣게 낭독하였습니다. …

하비에르는 나의 손을 잡고

‘그라시아스 파트리(Gratias Patri, 신부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어 그는 그의 고상을 입에 갖다 대고

‘착한 예수, 착한 천주’(Jesus bonus! Deus bonus!)를

열심히 되풀이하였습니다. …

우리의 성스러운 젊은이는 그의 천주님 곁으로 가기 위해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나머지 두 소년도 풍토병이라는 위협에 적응하며 낯선 언어를 계속 배워나갔습니다.
마카오 유학 생활은 적응과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스승들의 초기 편지에는 김대건의 복통, 두통, 요통 등 부적응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한양에서부터 라틴어 기초가 부족한 상태에서 출발한 김대건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일종의 ‘성장통’을 겪은 것입니다. 그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은 이 초기 유학 생활의 ‘부적응’을 용덕과 신덕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제 천주를 위해 죽게 되었으니 도리어 이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 빨리 때려 빨리 죽이십시오.”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