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6/24)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신학교에서 피정을 하게 되면 묵주기도를 하면서 신학교 주위를 돌아다닙니다.
맑은 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고 인위적인 소리가 아닌 맑고 깨끗한 자연의 소리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상태에서 묵주기도를 하며 걷고 있는데 반대쪽에서 은퇴를 하신 노(老) 신부님께서 묵주기도를 하시면서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둘의 간격이 가까워졌을 때 저는 고개를 숙이며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인사를 했지요.
바로 그 순간 그 신부님께서는 “아~~ 누구신부구나. 반가워. 우리 악수나 할까?”라고 말씀하시면서 제게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감동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이었지요.
저와 나이차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자그마치 35년 차이입니다.
저보다 10년 아래의 신부님들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자그마치 35년의 차이가 나는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그러면서 반성을 하고 다짐하게 됩니다.
저 역시 이제는 후배들의 이름을 외워주고 후배의 손을 잡아주는 선배 신부가 되겠다고 말이지요.
사실 주님께서는 그 원로 사목자 신부님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요.
그래서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모두 기억하시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계십니다.
즉,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것은 물론 우리의 손을 꼭 잡아서 용기와 힘까지 불러 일으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주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바로 주님을 내 삶에서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보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선이 주님께로가 아니라 세상에 맞추어 있으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을 태어나기 전부터 느꼈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방문 소리를 듣고 태중에서도 즐거워 뛰놀았다고 성경은 말하지요(루카 1,44).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 시선을 맞추고 있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그의 부모도 역시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주님의 뜻에 따라 ‘요한’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우리 역시 나의 모든 시선을 이제 주님께로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일상 안에서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따뜻한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주님께서 반갑다고 내미는 손에 악수를 하는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항상 무엇인가를 배워라. 이것이 참된 삶의 방식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배우지 않는 자는 인생을 살 자격이 없다. (아서 헬프스)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
모든 사람들이 좋은 꿈과 멋진 인생을 꿈꾸었지만
“내일” 또는 “다음에” 라는 말에 속아 인생을 그저
그런 삶으로 허비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오늘”내가 돕지 못하고 하지 못한 일은
“내일”에도 할 수 없습니다.
“다음” 이라는 기회에 속지 마십시오.
“다음”이 오지 않은 채 우리의 인생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해야 할 좋은 일을 지금부터
작게라도 시작하십시오.
일을 미루다보면 게으름의 군살이 성장보다는 퇴보가,
맑은 정신보다는 혼탁함이, 기쁨보다는 한숨이 더 빨리 찾아옵니다.
미루던 일을 시작하고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자신감과
기쁨이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부터 아주 작은 실천을 해보는 것 그것이 기쁨이 되어
인생의 역전의 홈런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