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말씀

†사순 특강 첫 번째 강의를 듣고..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마르 8,18)
[믿음]에 관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세 번이나 ‘나는 모른다’(루카 22,54-62)고 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18)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교회의 일,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양들을 보살피고 잘 돌보라(요한 21,15-19)는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거야’(마태 26,24)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의 차이는 회개이다. 베드로는 세 번 배신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교회의 직무, 양들을 묵묵히 돌보며 평가는 예수님께 맡겼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신했던 잘못을 뉘우치며 내가 감히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스스로 희생했다.

반면, 유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사도1,18-20) 이게 죄다. 작디작은 미천한 우리의 죄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보다 클 수 없다는 걸 믿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죄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보다는 클 수 없다는 진실이다.

우리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어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신앙의 여정이란, 한평생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인데 나로부터 하느님께로 걸어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믿는 자로써 하느님께로 걸어가야 자유가 주어진다. 나라는 존재보다 하느님으로 채워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믿음의 인물 중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이다. 그는 ‘내가 보여준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1) 나의 신원과 정체성이 묻어 있는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을 말씀에 바로 실행했다. 이것이 믿음의 확신이다. 새로운 곳으로의 초대에 응답한 것처럼 우리도 봉사단체에서 초대되면 아브라함처럼 “네 하겠습니다.”로 믿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탈출기(3,1-) 모세의 모습에서는, 불타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계기가 된다.

모세의 기구한 인생 여정에서 믿는 이들의 모습은 다 알지 못해도 다 계산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며 그저 걸어가야 한다.

믿음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마리아이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신앙의 여정은 나를 채우러 왔다가 나를 비우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참된 신앙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이성, 지성, 감성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하느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 차야 한다. 성모님은 너무나 어린 나이에 두려움과 걱정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엘리사벳을 찾아가 찬양하고 위로받으며 머물렀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역할을 금호동성당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며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의 도구로써 잘 쓰여질 수 있도록 역할하기를 바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하느님과의 유대를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 이 유대(紐帶)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 紐帶(유대, 관계의 끈)가 끊어지는 일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시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배 위에서 돌풍에 겁을 낼 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시며 꾸짖으신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걸 깨닫지 못한다.

즉, 믿음은 두려움 앞에 자꾸만 작아진다. 믿음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이다.

나의 상황 속에서 두려울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피하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있다.

믿음의 공동체는 항상 십자가가 따라온다.

고통과 시련이 주어지지 않고 십자가 없이는 영광을 바랄 순 없다.

예수님께서는 마르코복음(8장 31절)에서 첫 수난 예고를 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르 8,3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이고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기에 우리 신앙의 여정은 나를 비우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 그래야 자유를 얻는다.

 

우리가 동물과 다른 점은 ‘聖事的성사적 思考사고’를 하는 것이다.

성사는 하느님의 거룩한 일, 하느님의 은총이 보이지 않지만, 보이게 하는 것이 성사적 사고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물을 부어야 가능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은총이 보여 지는 것, 드러나는 가식적인 표징이 성사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 그 안에 사랑과 희생을 볼 수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소명은 성사적 사고가 단련되어야 한다.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는 이런 여정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가장 완전한 성사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연과 인간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내가 하는 봉사가 어떤 성사적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같이 보아야 봉헌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에 하느님께서 사랑을 어떻게 베푸는지 사랑이 담기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러면 삶이 문제가 아닌 신비로워지는 것이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이사야 52,13 ~ 53,12)

 

우리는 미사 때 擧揚聖體(거양성체)의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쪼개지고 나타나신 것이다. 사순시기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세상은 높이려고 하는데 철저하게 낮추고 역행하며 생명을 살리는 모습을 묵상하는 때이다.

우리도 그 믿음의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보이셨던 그 길을..

 

<교황 프란치스코님의 교훈>

‘그리스도는 인격입니다.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인격입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비운 인격입니다. 그는 죄를 짊어졌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광야에서 죄가 들어 올려졌듯이 여기에 하느님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들어 올려 지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죄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종이 되셨던 하느님 아들의 철저한 비하(卑下)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십자가는 예수그리스도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두려움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부인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직 그 때가 아니기에 우리는 죽음과 수난과 십자가의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믿음의 여정을 이어가기 위해서 유혹이 있을 때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고 철저하게 낮아지고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는 그런 마음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럴 수 있겠지를 떠올리며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믿음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2025. 3.13. 19:30 – 강사 최봉용 베드로 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