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강론

2026년 [사순] 특강1

주제 :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기념

 

프란치스칸 운동의 특징은,

순수하게 크리스챤 생활을 사는 것

즉, 사랑의 부르심에 빠르게 기쁜 마음으로 응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 나아가 모든 창조물과 형제적 관계를 맺는 신비로운 체험.

 

 

 

((성체))

“나는 주 안에서 사제가 된 나의 모든 형제들과 사제가 될 형제들과 지존하신 분의 사제가 되려는 뜻을 가진 형제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미사를 거행할 때… 거룩하고 깨끗한 지향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의 참다운 제사를

존경심을 가지고 순수한 사람이 되어 순수하게 드리도록 하십시오…

 

들으십시오, 나의 형제들이여:

복되신 동정녀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태중에 그분을 품으신 것만으로도 공경을 받는 것이 지당하다면,

복된 세례자 요한이 두려워 감히 하느님의 거룩한 머리에 손을 대지 못했다면,

그분이 잠시동안 누워 계셨던 무덤도 존경을 받는다면,

 

하물며 이제 죽지않고 영원히 살아계시어 영광받으신 분이며,

천사들도 보고 싶어하는 분을,

손으로 만지고 마음과 입으로 영하며 다른 이들이 영하도록 주는 사람은

그 얼마나 거룩하고 의롭고 합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제회에 보내신 편지 14 21~22)

육과 영의 용어를 성인이 많이 쓰는데,

성인의 이 사상은 성 바오로의 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육이라고 할 때는 다만 육체와 육체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육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자유로이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온갖 장애물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낡은 인간’(=) 이다.

‘낡은 인간’이 죽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풍부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육의 정신이란 이기주의와 같다.

모든 선과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차지하려는 교만과 욕심을 일컫는다.

반면에 주님의 정신이란, 각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과 은총의 생활, 성화와 봉사의 길인 애덕의 생활을 뜻한다.

 

 

 

(( 정결 ))

 

프란치스코에게 “정결하게 산다”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성인이 강조하는 “마음의 깨끗함과 정신의 단순성”의 일반적 개념을 먼저 알아야한다.

정결이란 마음이 가난한 데에서 우러나온다.

마음이 깨끗함은 영혼이 높이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에 대한 이탈이요 해방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것들을 멸시하고 천상 것들을 찾으며, 살아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영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권고 16)

 

“이기적 자신”의 요구 (탐욕, 안락, 자기애)를 억제하고 초월하는 마음은 깨끗함을 지니고, 이런 영혼은 해방되어 하느님과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순수한 성서적 개념에 의하면,

정결이란 일종의 덕행이라기보다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 자세이다.

 

해방된 상태에서 마음을 다 바쳐 하느님과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정결은

결혼 생활의 포기나 육체적 안락을 포기한다는 뜻보다 더욱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육체적 정결보다도 영신적 정결이다.

그리고 마음의 정결의 목적은 항상 “순결한 마음과 순결한 정신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흠숭하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 2번째 19).

 

 

 

(( 가난, 겸손 ))

 

“가난이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성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다”라고 대답한다.

(이론적 정의가 아니라 실천적인 행동,생활)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가난은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신분을 위하신” 야훼의 종의 비하 및 겸손하심과 일치한다.

그래서 성인은 이 두 요소를 함께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이라고 말한다.

(제 1회칙 9; 제 2회칙 6. 10;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동기는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난이란 완전히 사랑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가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의 결과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제2회칙 6)라는 이 신비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프란치스칸 가난의 신학적 기초이고 첫째가는 동기이다.

성인은 주님의 생애 중 그분의 비하와 겸손을 드러내는 가난을 무엇보다도 “베들레헴”과 “갈바리아”(골고타)의 신비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가난과 겸손의 신비가 이 세상에서 성체성사 안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확신한 성인은 제1권고에서 말하기를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인은 모든 덕행을 내적 가난과 관련시켜서 생각하였고,

반대로 모든 악습들은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소유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모든 선을 거스리는 육신”은 하느님의 소유인 것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하려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 영광으로 삼는다.

반대로,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또한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선을 분별하도록 해주시고, 이 선에 대하여 하느님께 온갖 영광을 돌리도록 가르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 기도와 신심행사에 열중하고 육신의 많은 극기와 고행을 하면서도,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 한 마디만 듣거나, 혹은 어떤 것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빰을 치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권고 14)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고 또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줄 많은 재물을 획득하려고 다만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문자(성서)의 정신을 따르기 원치 않고 말마디만을 배워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를 열망하는 수도자들은 문자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 문자나, 알고 싶어하는 문자를 모두 자기 육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그것들을 말과 표양으로 돌려드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문자의 정신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권고 7)

사람이 지식을 가질 때 그것을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형제회 초창기에 성인은 공부에 대하여 아주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성 안또니오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임을 알고서야 성인은 그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칠 것을 허락하였다.

 

*** 안또니오 성인의 설교 일화 ***

 

설교하는 형제들에게 특별히 내적 가난이 요구되었다. 설교자가 봉사직과 설교직을 자기 것으로 하면 안된다. 그러므로 설교의 성과를 자랑하는 설교자는 곧 설교직을 소유하는 것이 된다.

“매사에 자기 자신을 낮추도록 노력하고,

하느님이 여러분 안에서 혹은 여러분을 통해서

어떤 때 행하시고,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좋은 말과 일에 대해,

더 나아가 어떤 선에 대해서도 자랑하지 말고,

자만자족하지도 말며,

혹은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지도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제1회칙 17, 5~6)

 

내적 가난이 없는 곳에 겸손도 없다. 또한 봉사도 사랑도 없다.

 

 

 

(( 작음 Minoritas, 겸손 ))

 

성 프란치스코는 ‘작다’라는 뜻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성서적 구절들을 항상 ‘형제적 봉사, 겸손, 섬김’들의 의미와 연결시킨다.

‘Minoritas’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자세로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자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사람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섬기려 오셨던” 주님을 따라야하기 때문이다.

‘작음’은 무엇보다도 높으신 주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

 

참된 겸손이란,

억지로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낮추려고 하는 행동에 있지 않고,

단순하게 진리 앞에서 서서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기 보다는 남을 존경하는데 있다.

 

에지디오 형제는 겸손을 잘 표현하였다:

겸손이란 하느님께 자리를 비워드리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눈이 단순하고 작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향한다.

프란치스코에게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 즉,

사랑, 온유함, 부드러움, 비폭력, 봉사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가난의 의미는 우리의 인생관을 “하느님의 나라”에 두면서

하느님을 찾고 소유하며,

재물이라는 유혹에서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키는데 있다.

복음적 가난의 의미는 하느님이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재물을 사용하는데 있다.

이 목적은 재물이 사람들의 일용한 양식이 되고

사람들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주며,

사람들이 일함으로써 일의 경제적인 이익을

삶과 공동선과 봉사를 위하여 사용하도록 한다.

 

복음적 가난이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으뜸임을 재확인하는 것이요,

자유와 겸손의 표현이요,

단순 생활의 양식이요,

기쁨의 원천이다.

 

 

 

(( 단순성 ))

복음적 가난은 이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사람을 해방시킨다.

세상 근심 걱정들은 사람의 마음에서 순수한 기쁨을 빼앗아 가고, 그대신 마음을 야심과 거짓으로 어둡게 만든다.

그와 반대로 온갖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적 가난은 또한 정신적 장애물에서도 해방을 가져다 준다.

그 결과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가벼움과 자유스러움, 깨끗함과 개방의 상태를 누리게 된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으며 아무 것도 가면처럼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자기 발길을 비추는 사랑에 이끌려 진리 안에서 살고 밝은 생활을 하게 된다.

 

보통으로 수덕학 교과서가 잘 다루지 않는 몇가지 복음적 덕행들이 있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이것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덕행들 중에 단순성과 기쁨을 들 수 있다. 단순성과 기쁨은 크리스챤 체험을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덕행들이며, 결국 성령 현존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이야말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초기 교회가 누리게 된 “기쁨과 단순한 마음”의 열매들이다. (참조:사도 2,46; 로마 12,8; 고린2 8,2.9,11.11,3)

 

“단순성” 혹은 “순진함”이란

인간의 본성이나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영신적 자세이다.

구약성서에서 단순성은 의로움과 도덕적 충실함을 의미하고,

복음서에서는 가난한 정신에서 나오는 마음의 자세와 동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이리떼 가운데 파견된 양처럼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기”를 원하셨다(마태 10,16).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과 같이 순진하고 신뢰를 하며, 생활과 말에 있어서 솔직하고 사람들의 간계 때문에 오해를 당할 망정 거짓과 두 마음이 없기를 가르치셨다 (참조: 마태 5,33~42. 6,1~6)

성인에게 단순성은 마음의 가난과 의로움의 열매이다.

또한

“하느님만을 소유할 때 만족하고, 다른 모든 것을 멸시하도록 하는” 덕행이기도 하다.

 

첼라노는 단순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단순성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자랑하고, 악행을 할 줄 모르며, 악한 말을 할 줄 모른다.

이러한 단순성은 자신을 반성하기 때문에, 아무도 단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권리를 탐하지 않으며, 더 나은 사람에게 그 것을 양보한다.

이러한 단순성은 헛된 학문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배우거나 가르치기보다 행동을 택한다.

이러한 단순성은 성서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껍질이 아닌 알맹이를 찾으며, 거죽이 아닌 속을, 양이 아닌 질을, 그리고 최고의 영원한 선을 찾는다.” (2첼라노 189)

 

“덕행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성인은 단순성이 지혜의 자매라고 한다.

지혜란 지식보다 높은 차원이므로 지식과 체험을 동시에 포함하며,

성숙한 신앙심과 하느님의 풍부한 빛을 기초로 한다.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성과 마음의 순종이 요구된다.

지혜는 복음의 말씀대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에게”(마태 11,25) 하느님이 베푸시는 당신 신비에 대한 깨달음이다.

오늘날 사회인들은 위선, 형식, 척하는 것에 대하여 반항적인 자세를 보인다. 오늘날 세계는 진실성과 솔직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솔직성과 단순성의 메시지는 현대 세계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진다.

복음적인 솔직성과 단순성은 천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정화와 수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덕행이로서,

진리를 구하며 교만과 허식에서 해방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와 같이 속으로나 겉으로 똑같이 밝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 한계와 약점을 인식할수록 이것들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어떤 “자격지심”이나 “열등감” 때문에 그 한계나 약점을 복잡한 모양, 위장, 형식, 가면 등으로 보충하려고 하는 법이다.

그러나 진복팔단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안과 밖에 있는 사건들을 진리 안에서 판단할 줄 알기 때문에 자신감과 안정감을 누리면서 마태 5,37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다.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기쁨 ))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권고 27)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 사람은 삶의 기쁨을 누린다. 가난만을 주장하며 우울하고 비통한 이상을 제시한 당대의 개혁자들과는 달리,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기쁨을 함께 연결시켰다.

 

흔히 사람들은 부유함을 행복에, 가난을 불행과 연결시키지만, 감각과 영적인 것이 하나 될 때, 기쁨이 솟아온다. 그래서 인간이 간절히 갈망하는 기쁨은 주님의 기쁨에 들어갈 때 이루어진다.

“당신은 온화이시오며 안식처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평화이시오며 기쁨이시나이다”라고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하였다.(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4).

이와 같이 영원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충만한 기쁨에 인간들을 참여시키려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요한 15,11.17,13).

 

기쁨은 하느님 자녀들의 유산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위선자들처럼 침울한 표정을 짓고 얼굴에 그러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하느님을 찬양할 것을 원하시지 않고, 단식할 때도 기쁘게 매력있게 행동하기를 원하셨다(마태 6,16~18).

그리고 성 바오로는 재차 기쁨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끊임없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기”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기쁨은 술을 마시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풍부함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에페 5,18; 골로 3,16).

 

신앙으로 복음적 메시지를 받는 크리스챤들에게 이러한 성령의 기쁨이 주어진다. (1데살 1,6; 사도 8,39.13,48~52)

기쁨은 크리스챤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열매이고, (갈라 5,22)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지체들과 상통하시는 생명의 일치의 결과이다 (로마 14,17; 필립4,1)

그러므로 신앙과 은총이 성장할 때 기쁨도 커지기 마련이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기쁨의 분위기를 누렸다.

“한 마음이 되어 기쁘고 순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사도 2,46).

그리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박해와 고난이 닥쳐올 때 그 신자들의 기쁨도 더욱 커졌으며 더욱 순수한 기쁨으로 변했다. (참조: 사도 5,41. 13,52)

그들은 재산을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 고통을 기쁘게 견디어 냈다. (참조: 히브 19,34)

그리고 극빈 가운데서 기쁨에 차 있었다 (참조: 2고린 8,2)

 

크리스챤이 기쁘게 살아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필립 4,5)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업적과 더불어 영원한 기쁨에 대한 기대와 희망만이 여정 중에 있는 교회의 생명을 새롭게 한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 안에서 알렐루야로 기쁨을 끊임없이 드러내며, 미사와 성무일도의 여러 기도에서 기쁨을 표현한다.

 

 

“가난 부인”을 즐겁게 해주려면, 형제들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내적 외적으로 명랑해야 하고, 세계에 기쁨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기를 성인은 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슬프게 보이는 형제들에 대해 참지 못하였고 기분이 나쁘게 보였던 어떤 형제들을 다음과 같이 나무랐다:“죄는 당신의 방에서 반성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 앞에서 울고 신음하십시오. 형제들에게 돌아올 때는 슬픔을 없애고 다른 형제들과 어울리도록 하십시오”(2첼라노 128).

 

성 프란치스코는 우울함을 “바빌론적 악”이라고 부르고, 이 병에 걸리는 형제는 마귀의 올가미에 빠져 유혹에 떨어지게 된다고 가르쳤다.

성인이 가르치기를 : “참된 기쁨이란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기도생활로써 획득된다.”

그리고 참된 기쁨의 열매는 “열성과 부지런함, 선한 일을 기쁘게 하기 위한 마음의 재빠름과 내적 외적 마음가짐”이라고 하였다.(완덕의 거울 96)

 

“주님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 업적 외에 다른 데서는 흐뭇함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또한 그것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에로 인도하는 수도자는 복됩니다. 쓸데 없고 헛된 말을 즐겨하면서, 또한 그것으로 사람들을 웃기려는 수도자는 불행합니다”(권고 20).

 

그러나 가장 완전하고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충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데 있다. 이러한 기쁨은 영적인 것이며, 성령의 열매이다.

크리스챤 기쁨은 고통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주 고통으로 정화되고 양육된다.

 

새로운 형제회가 발전해 가는 것을 볼때 창립자로서 느낀 그 기쁨은 완전한 기쁨이 아니고, 형제들에게서 멸시와 오해를 당할 때 흥분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견디어 내는 것이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잔꽃송이 74)

 

황광우 요셉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