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일 강론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법망을 피해 오랫동안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공소시효는 6년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늘 공소시효가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6년이 지났다고 생각한 그는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날짜 계산을 잘못해서 공소시효 만기 3일전에 자수를 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아 그 간의 고생이 헛되이 쇠고랑을 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억울하겠다. 정말 재수 없다. 시간 계산만 잘 했어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사람이 억울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시원하고 후련합니다. 사실 저는 그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죄 값을 치르게 되었으니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 불안감을 없애려고 하지만, 일시적으로 잊힐지는 몰라도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우리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더군다나 언제 올지 모를 사람의 아들이 재림하는 최후의 심판 때를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력으로 새해에 해당되는 오늘 대림 제1주일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하느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생활을 더 강조했고, 그래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 어떻게 될 지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아무런 대책없이 쾌락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쾌락만을,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부만을 좋아한다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대림 제1주일. 교회의 새해인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뜻에 맞게 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여전히 다음에 하겠다면서 뒤로 미루고 있는지 말입니다.
진짜 적(고도원, ‘나무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중에서)
칭기스칸은 성을 쌓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반을 정복했지만 어느 곳에도 성을 쌓지 않았다. 칭기스칸이 원한 것은 정복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곳에 안주할 수 있는 편안한 길을 가지 않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말을 달렸다. 칭기스칸의 전사들은 소유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달린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달린 것은 칭기스칸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질서에 동참하는 일이었으며, 그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가 자신의 현재를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그들의 삶을 값지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회없이 말을 달렸다. 그리고 질주가 가로막힐 때마다 격렬한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려는 자들과 소유가 아니라 꿈을 위해 달리는 자들의 싸움은 언제나 불을 보듯 뻔했다. 유목민의 승리였다. 꿈의 승리였다. 우리는 칭기스칸으로부터 정복과 피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다.
맹목적인 질주를 배우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배우려 하는 것은 지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신에 대한 그 끝없는 훈육이다.
인생의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의 내부에 있다. 그것은 바로 안락이며, 배부름이며, 육신의 편안함이다. 지금 현재에 안주하여 멈춰 서 있는 자기 자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