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승천 대축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 위에 뚜껑으로 가려져 있는 항아리를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지나가는 사람 두 명에게 “이게 무엇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항아리를 자세히 살펴 보더니만 대답합니다.
“청자 항아리군! 꽤 오래된 골동품이네요. 값이 제법 나가겠는데요?”
두 번째 사람은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서 속을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또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맛도 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술이 담겨 있는 청자 항아리입니다.”
누가 더 그 항아리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했을까요?
당연히 두 번째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두 번째 사람의 모습보다는 첫 번째 사람과 같이 겉모습만 보고서 판단하고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 방법이 훨씬 쉬우니까요.
그러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속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앞서 항아리를 정확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뚜껑을 열어 냄새도 맡아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맛도 보는 수고로움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수고로움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로움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우리들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 그렇지요.
저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은 보는 수고로움은 생략한 채 그냥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님의 자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수고로움이 없는 행동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도 경직되게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랑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수고로움은 경직된 나를 부드럽게 해주는 것은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실천을 할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그 결과 이 세상 곳곳에 계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성모님을 떠올려 봅니다. 성모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수고로움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잉태했음에도 불구하고 편한 길로 가려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세상의 영광보다는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수고로움의 연속인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기념하듯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 앞에 놓인 수고로움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수고로움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그 길을 힘차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을 이 세상에 뿌리 내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뿌리 내릴 때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영광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신은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 뜨린다. (장영희)
깨달음을 얻은 날
(김홍신, ‘인생사용 설명서’ 중에서)
어느 대기업의 사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람을 마주 보고 맞으면 역풍이지만 뒤로 돌아서서 맞으면 순풍이 된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뀝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바뀌고 상대가 바뀌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만큼씩 바뀌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남보다 돈도 많고 명예도 지위도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성철 대선사의 말씀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그까짓 명예가 내 목숨보다 중요한 것도, 영원히 변치 않는 것도, 나 홀로 가져야 하는 것도, 설령 명예를 잃어도 되찾지 못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 그날 밤부터 잠도 잘 자고 밥맛도 생기고 생기가 돌면서 금세 체중도 원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그리도 평온한 것을,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을 묶어 놓고 질질 끌려 다녔기에 분별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돈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명예를 잃으면 아주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옳은 소리라는 생각을 했으면서 막상 제 문제에 봉착하니 쉽게 마음이 정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때 명예를 잃은 것도 손해를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 닥칠지 모를 큰 고통에 대비해 예방주사를 맞은 셈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