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강론] 2021.09.12 연중 제 24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마 황태와 북어의 차이점을 아실 것입니다.

우선 황태나 북어나 똑같이 명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분은 말리는 장소에 따라 결정되더군요.

우선 용대리에서는 우리나라 황태의 80% 이상을 생산하는데, 이곳 지형이 바람과 폭설이라는 악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일교차가 매우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낮에는 녹고 밤에는 얼고를 스무 번 이상 반복해서 말릴 수가 있는데, 이때 빛이 누렇고 살이 연하고 부드러우며 쫄깃한 육질을 내는 황태가 됩니다.

하지만 명태를 바닷가에서 그냥 말리면 마른 장작처럼 딱딱한 북어가 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혹독한 시련기를 겪은 것들이 당도도 높고 맛도 아주 좋았습니다.

해풍을 맞고 자란 포도가 훨씬 맛있지요.

또한 하우스 배추보다는 해남 지역에서 한겨울에 재배한 ‘월동배추’가 더 맛있다고 합니다.

한우도 낮과 밤의 큰 기온차를 견딘 경북 안동, 영주, 예천 지방의 것들이 더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사람이 다른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매스컴을 통해서도 보도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시련과 고통을 이겨서 영광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들을 잘 보면, 모두가 시련을 거친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시련을 거치지 않으면 무엇 하나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결국 시련과 고통은 주님의 뜻이 담긴 또 다른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련과 고통을 무조건 피하려고 한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이 이해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예수님 편에 서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이라는 심한 표현까지 쓰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하느님의 관점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으로만 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다시금 반성하게 됩니다.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만 던졌던 내 자신.

그러한 내가 바로 베드로처럼 핀잔의 소리를 듣고 있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는 사람의 일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올바른 식별력과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단호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한 번 약속을 어겨 신뢰를 잃는 것보다 백 번 거절해서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낫다. (중국 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