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2022.03.05 성모 신심 미사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어떤 군인이 전쟁 중에 사형 선고를 받아 사형 집행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총 사령관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자네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총살 대 앞에 죽든지, 아니면 저기 검은 문을 지나가든지 하나를 택하라.”
그리고 총사령관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었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난 후에 총사령관이 물었습니다.
“자네는 어느 쪽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는가?”
사형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검은 문을 열면 어떤 일이 생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더 끔찍한 운명이 기다릴지 모르니 차라리 사형을 선택하겠습니다.”
드디어 사형 집행 명령이 떨어지고 발포가 되어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사령관의 직속부하가 묻습니다.
“사령관님! 저 문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사령관은 아주 짧게 대답했습니다.
“자유”
만약 이 병사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지막 가능성의 문까지 들어섰더라면 ‘자유’라는 커다란 선물을 얻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검은 문’이 더 끔찍한 운명으로 이끌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삶의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인지 성모님은 삶에 대한 믿음에서 이 말씀을 믿었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예수님을 따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주님의 믿음과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단순히 지금의 어려움을 보고서, 또한 앞으로의 나의 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스스로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아마 성모님도 우리와 같다면 어려웠던 주님의 길에서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당신 앞에서 자신의 아들이 죽음까지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믿었기에 주님의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대학에 실렸던 글입니다.
– 주는 사랑의 행복(이아영/ 99.10.17 서강주보)
오랜만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변함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여전히 행복하다는 편지다.
미국에서 친구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나는 항상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너 아직도 행복하니?” 나의 미련한 질문에 친구는 항상 웃으며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혼자 어렵게 대학에 진학한 터라 집안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친구가 사랑을 하게 된 남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당연히 집안에서의 극심한 반대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그 친구는 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집을 나와야만 했다.
“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부모님도 언젠가 나를 이해해주실 거라 믿어”하며 친구는 밝게 웃었지만, 우리 모두 결국은 그 친구가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2년 후 친구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친구가 후회를 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바보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웃음은 너무 행복해 보였고, 그날 나의 친구는 너무 아름다웠다.
나는 왜 그녀가 불행해질 것이라 생각했을까?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선택하기 힘든 길을 그녀가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택한 사람들이 불행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받은 것보다 주는 것이 많기에 더욱 행복하다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단순한 진리를 잊은 채 받으려고만 하다 오히려 진정한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닌지…
주는 사랑에 행복을 느끼는 그녀의 모습에 따스함과 부러움을 느낀다.
우리의 삶의 무게는 늘 무겁습니다.
성모님도 그 무게를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과 그 사랑을 믿으셨기에 오늘날 교회를 지켜주십니다.
또한 우리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기술이다. (알퐁스 도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