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강론] 2022.05.08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친구에게 자랑을 합니다.

“내 아들이 보청기를 새로 하나 사줬어. 그런데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글쎄 지나가는 개미 소리까지도 들린다니까?”

개미 소리까지 들린다고 하니까 무척 비싸겠다고 생각했던 할아버지 친구께서는 “그러면 그 보청기 얼마야?”라고 물어보셨지요.

이에 할아버지께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응. 오후 세시야.”

어때요? 보청기 성능이 좋은 것 같습니까? 아니지요.

보청기 성능이 별로인지 얼마냐는 질문을 몇 시냐는 질문으로 잘못 들으신 것이지요.

이렇게 잘 듣지 않으면 잘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보청기 CF에 나오는 이 말에 큰 공감을 갖게 됩니다.

“소리가 안 들리면 가족과의 대화도 단절됩니다.”

이 카피문구를 들으면서 문득 이렇게 말을 바꿔봅니다.

“주님의 소리가 안 들리면 주님과의 대화도 단절됩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 있는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소리들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이렇게 해야 행복할 것이라고 유혹하는 소리들이 너무나 많고, 이 소리는 듣기에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소리는 나를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즉, 당신의 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을 따르는 양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양은 매우 청력이 발달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 매우 겁이 많은 동물이지요.

그래서 조그마한 소리만 나도 겁을 내고 도망을 친답니다.

그러나 소리를 듣고도 놀라지도 도망치지 않을 때가 있다고 해요.

바로 주인의 목소리를 들을 때라고 합니다.

물론 청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다른 많은 소리도 듣겠지만, 신기하게도 주인의 목소리를 들으면 안심하고 그 자리를 지킨답니다.

우리도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소리를 더 크게 듣습니다.

그래서 돈이 좋고 명예가 좋다고 이야기하며,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는데 더 큰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의 소리로 인해 주님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되고, 어렵고 힘들다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목소리는 성직자, 수도자에게만 들려지는 소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께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또렷하게 들리는 생명의 말씀, 구원의 소리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가득하신 그 소리. 이제는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전화기에는 너무 많이, 자연에는 너무 적게 귀를 기울인다. 자연의 가장 큰 소리는 침묵이다(코스탈레네츠).

 

 

‘아름답다’의 네 가지 얼굴(유영만, ‘청춘경영’ 중에서)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정말 아름답구나’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첫째, ‘아름다움’은 ‘앓음다움’에서 나왔다고 한다. 앓는 동안 아픔의 상처가 흔적이 되고, 그 흔적은 시간과 더불어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진주조개의 아름다움은 조개의 속살에 생긴 상처를 메워 가면서 탄생된다고 한다. 상처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의 두 번째 어원은 한자 ‘美’에서 찾을 수 있다. ‘美’는 ‘양(羊)’자 밑에 큰 ‘대(大)’자가 붙은 글자다. 본디 ‘큰 양’을 뜻했으니 양의 모양과 성질에서 ‘아름답다’의 뜻이 되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말은 ‘양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주인의 흐뭇한 마음’이라는 해석이다.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알다(知)’라는 동사 어간에 ‘음’이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생겼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아름다운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모름다움’이다.

 

네 번째, ‘포옹하다’를 의미하는 ‘안다’에 접미사 ‘음’을 붙어서 ‘안음’이라는 말이 생겼고, 이것이 다시 ‘아름다움’으로 변했다고 한다. 내가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과 정도를 아는 마음이 아름다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