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2022.08.14 연중 제20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어렸을 때 이가 흔들리게 되면 얼마나 두렵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이를 뽑는다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머니께서 흔들리는 이를 뽑겠다면서 실을 감아서 잡아당길 때, 아니면 직접 손으로 뽑아준다면서 달려들었던 기억은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뽑지 않겠다고 하면 잔뜩 겁을 줍니다.
이를 뽑지 않으면 덧니가 되어서 흉측하게 된다면서 말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이가 흔들려도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면 곧바로 뽑겠다고 달려들 테니까요.
그렇다면 말하지 않아서 공포와 두려움이 없어졌을까요? 아닙니다.
덧니가 되어서 흉측하게 변할 치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혀끝으로 흔들리는 치아를 계속해서 밀어내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하루 종일 우울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러다가 용기를 내서 흔들리는 치아를 빼게 됩니다.
약간의 따끔함이 있기는 하지만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개운하고 후련합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걱정과 우울함, 공포와 두려움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무엇인가를 시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지금을 잘 살게 하지 못하는 걱정과 우울함,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이 되는 무엇인가를 용기 있게 시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뭐 광고 카피의 문구처럼, 바로 ‘Just do it(일단 한 번 해봐).’을 외치고 행동하면 어떨까요?
변화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아쉬움도 이야기하시지요.
이 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불일 것입니다.
이 세상 전체에 사랑의 불이 활활 타올라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주님의 가치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이 간격으로 인해 분열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분열이나 분쟁이 두려워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치아를 뽑아야 모든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랑의 불을 켜기 위한 우리의 시도와 노력을 통해 내 안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용기와 인내가 가진 마법 같은 힘은 어려움과 장애물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존 애덤스).
나부터 변화되자.
2008년 리즈 대학에서는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 팀은 피실험자 그룹에게 넓은 실내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말이나 몸짓을 주고받지 말고 그냥 걸어 보러가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구 팀은 사전에 일부 몇몇 피실험자들에게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세부적인 지시를 내려 주었던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자신의 방향을 알고 있었던 몇몇 피실험자들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실험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보를 지닌 개인들이 단 5퍼센트만 있어도 군중들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나머지 95퍼센트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무리를 따라간다.”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정확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면서 변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단 5퍼센트만 있어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를 쫓게 되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실험 결과를 보면서 세상의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나부터가 변화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