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2022.08.21. 연중 제21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어느 날 부자가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의 초라한 옷차림을 본 종업원은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작은 비누와 너덜너덜한 수건을 주었지요.
목욕을 마친 그는 종업원들에게 금화 한 개씩을 팁이라면서 각각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깜짝 놀랐지요.
더군다나 그들이 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기보다도 오히려 후한 팁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도 했지요.
‘우리가 그를 융숭하게 대접했더라면 더 많은 금화를 팁으로 주지 않았을까?’
일주일 뒤 부자가 다시 그 목욕탕을 찾아왔습니다.
종업원들은 그를 알아보고 이번에는 왕처럼 대접했습니다.
그에게 무료로 마사지도 해주고, 몸에 좋은 향수도 뿌려주면서 극도로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목욕이 끝나자 부자는 그 종업원들에게 팁이라며 100원씩만 주는 것입니다.
크게 실망한 종업원들을 바라보며 부자가 말했습니다.
“이 동전은 지난 번 서비스에 대한 것이고, 지난 번 금화는 오늘 서비스에 대한 것이네.”
이 부자의 행동이 공평합니까? 공평하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공평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자신의 행동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이의 행동을 섣부르게 판단하기에 급급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대상은 나의 이웃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향할 때도 종종 있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무조건적으로 구원의 문이 자기에게만은 활짝 열리기를 바라기 보다는, 그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첫째처럼 보이는 사람이 꼴찌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꼴찌처럼 보였던 사람이 첫째가 될 수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그 좁은 구원의 문에 자신 있게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큰 사랑을 간직하고 나의 이웃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의 형제님 한 분이 전력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이렇게 전기가 나가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전력회사 직원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부터 빨리 드십시오.”
정전되면 냉장고의 아이스크림이 녹을 테니 빨리 먹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우리들에게도 우선순위는 사랑의 실천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당장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삶의 목표는 찾을 가치가 있는 유일한 행운이다(G.K.체스터톤).
난 용감한 척할 수 있다(리처드 스텐절, ‘만델라스 웨이’ 중에서)
1963년 5월 만델라는 그에게 곧 종신형을 선고하게 될 리보니아 재판 기간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다시 만델라의 옆에는 스티브 테푸라는 나이 든 수감자가 있었다. 섬에 도착했을 때 만델라와 테푸가 뒤처지자 한 교도관이 고함을 질렀다. “이 새끼들, 여기서 죽여 버릴 거야.” 그들이 교도소 본관 건물에 도착했을 때 교도관이 다시 소리쳤다. “옷 벗어!”
수감자들이 알몸이 되자 교도관들은 한 사람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교도관장이 어떤 사람에게 말했어요. ‘왜 이렇게 머리카락이 길어?’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힘겨워했죠. 그러자 다시 교도관장이 말했어요. ‘규정을 몰라? 머리를 잘랐어야지!’ 그래서 난 그에게 말했어요. ‘저기요…’ 아, 그게 전부였어요.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죠. 그가 말했어요. ‘나에게 그딴 식으로 말하지마!’”
만델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의자에 몸을 기대며 회상에 잠겼다. “날 때릴 게 분명했죠. 솔직히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나 만델라는 해냈다. 교도관장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건드리려면 그렇게 해 보시오. 난 남아공 대법원에 당신을 세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오.’ 그러자 그가 멈췄어요. 놀라운 일이었죠. 내가 용감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누군가는 용감한 척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종종 용감한 척하는 것을 통해서 참된 용기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용감한 척하는 게 바로 용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