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강론] 2022.09.11 연중 제24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고해성사를 주다보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과 그렇지 않은 분의 구분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는 분의 죄 고백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분은 매우 간략하며 포괄적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죄를 많이 지은 것 같고, 그렇지 않은 분은 참된 의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을 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참회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요?

이러한 예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경이 지저분하다는 것을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밝은 곳에 가게 되면 안경에 묻은 이 물질들이 너무나도 잘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지저분한데도 불구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바로 밝은 곳에서만 얼룩이 많이 있고 지저분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어항이 어두운 방 안에 있을 때에는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햇빛이 이 어항을 비추면 어떨까요?

어항 물에 떠다니는 무수한 찌꺼기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어두울 때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밝은 빛이 나를 비추게 되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온갖 죄악들을 밝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죄를 뉘우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두운 곳에 있을 때에는 그것이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해도 무덤덤할 수밖에 없으며, 진심으로 회개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시는 분이십니다.

즉, 회개하는 죄인을 향해 항상 찾아나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 나아가지 않는, 아니 나를 찾고 계시는 주님을 오히려 피해 도망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한지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날 지은 죄와 허물을 보시지 않고 회개하여 당신 앞에 나아가는 것 자체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 이제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평생 내가 깨달은 단 한 가지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캐서린 헵번).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좋은 생각’ 중에서)

 

어느 날,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스승은 때가 아니라며 대답을 미뤘다.

 

몇 년 뒤, 스승은 제자를 데리고 숲으로 향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 내 뒤를 따라라.” 스승은 말을 마치자마자 숲속을 살피기 시작하더니 아름드리나무를 끌어안고 소리 질렀다.

 

“이놈의 나무야, 날 놔라! 사람 살려!”

 

영문을 알 수 없는 제자는 나무에 달라붙은 스승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스승은 계속 살려 달라고 소리칠 뿐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제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무가 스승님을 붙잡은 게 아니라 스승님이 나무를 부여안으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나무한테 놓으라고 하시다니요. 나무를 잡은 손을 놓으시면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제야 스승은 나무를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말했다. “지금 네가 말한 것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인생의 모든 고통과 번민은 욕심으로부터 오지. 물질과 명예, 사람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들을 붙잡고 놓지 못해 괴로운 것임을 늘 염두에 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