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2022.10.16. 연중 제29주일. 부마민주항쟁 기념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전에 거리에 나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있더군요.
그런데 우연히 여자 핸드백을 들고 있는 어떤 형제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남자인데 왜 여자 핸드백을 들고 있을까 싶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지요.
여자 친구의 핸드백을 대신 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보니 그런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가방이 그렇게 무겁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여자 친구이기에 가방을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옆에 여자 친구도 없는데 남자 혼자서 여자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있으면 어떨까요?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 친구가 옆에 있고 그녀를 사랑하기에 망신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용감하게 핸드백을 들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다 할 수가 있다는 것.
하긴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셨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주님 때문에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할 것입니다.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할 것이며, 주님께 철저히 매달리는 순명도 우리에게서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에 더욱 더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온전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생활하기는 힘들지요.
그러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감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부족함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잘되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당신을 향해 기도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의 바램을 지체 없이 들어주시고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히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주신다는 확신 가득한 믿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 속에서 주님께서는 최고의 것을 우리에게 큰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과 친해지면 행복도 피할 수 없게 된다(칼 야스퍼스).
승부의 기준(‘좋은생각’ 중에서)
한 서양 남자가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원주민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서양인은 원주민과 다니며 서양 문화가 얼마나 편리하고 앞선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어느 날 해변을 걷던 서양인은 원주민에게 시합을 제안했다.
“여기서부터 저쪽 나무까지 달리기 시합을 해 봐요. 일주일 뒤에 말이죠. 그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연습하고요.”
시합 날, 출발 신호가 울리자 서양인은 재빨리 앞으로 뛰어 나갔다.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땀을 뻘뻘 흘리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뒤돌아본 그의 얼굴에 득의만만한 미소가 흘렀다. 원주민은 이제 겨우 중간 지점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주민은 파도에 둥실둥실 떠내려가듯, 사뿐사뿐 춤추듯, 크고 느린 보폭으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달렸다. 이윽고 결승선을 통과한 원주민은 껑충껑충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걸 본 서양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이겼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 겁니까?”
그러자 원주민이 순박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이긴 것 아닙니까? 당신보다 훨씬 아름답게 달렸잖아요.”
당신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늘 앞서는 것, 빠른 것만이 승부의 기준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