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강론] 2022.10.23 연중 제30주일. 전교 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이렇게 다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오늘은 대충 대충 살아야겠다. 어제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는 하루를 보내야지.’

아마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새벽에 일어나면 이러한 기도로써 다짐을 하지요.

“주님, 오늘 하루가 당신의 마음에 드는 멋진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신께서도 도와주소서.”

그런데 문제는 그 다짐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성찰을 하면서 이러한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네요.

“주님, 오늘도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글쎄 또 죄의 유혹에 넘어갔네요. 주님, 용서해주세요.”

하루를 시작하면서 했던 다짐과 하루를 마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면 이렇게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분명히 내 몸이고 나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성찰 시간에는 내 첫 마음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체험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인간들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다시금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자신의 몸과 자신의 생각조차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길 수 있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하긴 예수님을 직접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심하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소집하세요.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직접 만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이들의 의심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죽었다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지요.

비록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자신의 두 귀로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게 꿈이야 생시야?’하면서 의심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 의심을 계속해서 범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천년 전에만, 단 일회적으로 활동하셨던 분이 아니지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관여하시면서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님의 그러한 활동을 얼마나 의심합니까?

그래서 주님께 “왜 저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원망하시는 분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께서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약속에 다시 힘을 내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전교주일입니다. 전교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몸으로 행하는 모범을 통해서 훌륭한 전교를 할 수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세요.

 

 

우리의 마음에는 두개의 저울이 있다.(‘생각을 바꾸면 성공이 보인다’ 중에서)

 

우리의 마음에는 두개의 저울이 있다.

 

남에게 줄 때 다는 저울과

남으로부터 받을 때 다는 저울.

두개의 눈금은 서로 다르다.

 

남에게 줄때 재는 저울은

실제보다 많이 표시되고,

 

남으로부터 받을 때 재는 저울은

실제보다 적게 표시된다.

 

그래서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아도

항상 손해 본 듯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두 저울의 눈금 차이를

적게 할 수 있다면…

만일 눈금 차이를 줄이는 것이 어렵다면,

 

남에게 줄 때는 조금 덜 준 듯이

남으로부터 받을 때는 조금 더 많이 받은 듯이

생각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조금은

더 받은 듯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