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강론

[강론] 2023.1.29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옛날 어떤 온천장에 이러한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피부병 환자에 특효.”

워낙 온천물이 좋기 때문에 피부병 환자가 큰 효과를 볼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표지판에 다음과 같은 글도 붙어 있다고 하네요.

“주의: 피부병 환자 출입금지.”

피부병 환자에게 참 좋은 온천물이지만, 피부병 환자는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말 따로 행동 따로의 글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러한 모습을 취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올바른 말을 하고는 있지만 행동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리고 이런 모습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명한 모습이라며 스스로 합리화를 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재미있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요?

텔레비전을 보면 재미있는 방송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빠지게 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게 화면만을 쳐다보게 됩니다.

분명히 재미라는 것을 내게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종일 재미 때문에 텔레비전만 보고 있으면, 밤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아 허탈한 생각만 들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삶은 재미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의미를 찾아가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의미를 찾아가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안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을 투신해서 정말로 열심히 생활합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을 체험하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행복의 길로 들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시지요.

단순히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부귀영화에 행복이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참된 의미를 찾아가는 삶, 그래서 말과 행동이 일치할 수 있는 삶 안에 행복이 있음을 여덟 가지 행복 선언을 통해서 이야기해주십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세상의 것을 쫓는 재미를 찾는 삶이었다면 참 행복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를 찾아가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라면 참 행복이 내게 멀리 있지 않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참 행복을 위해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 더욱 더 노력하는 오늘 하루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말하는 사람의 반대말은 듣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이다.(프란 레보위츠)

 

 

어울림(스탠 톨러, ‘행운의 절반, 친구’ 중에서)

 

커피 원두는 충분히 볶지 않으면 신맛이 나고, 너무 오래 볶으면 탄 맛이 나지. 사람은 볶기 전의 원두 같아. 저마다 영혼에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지만,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화학반응이 필요하지. 그래서 볶는 과정이 필요한 거야. 어울리면서 서로의 향을 발산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