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의 미소 9]
돌풍
어느 지방에서는 영구차를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동네도 있다. 지방에 있는 故인 고향에 있는 선산에 매장을 할 경우,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질러가면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여름이건, 겨울이건, 마을 주민들이 영구차를 들어서지 못하게 하므로 고인을 모시고 동구 밖으로 돌아서 선산까지 도보로 운구를 하게 될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길도 없는 숲을 해치며 이리저리 꼬불꼬불 논둑 길, 밭둑 길을 오르내리며 찔레나무, 엉겅퀴, 칡넝쿨 등에 긁히며 올라가야 하는데 그럴 때는 정말 힘이 든다.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아침까지도 굵은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르고 줄기차게 내렸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영구차를 타고 장거리인 고인의 선산을 향해 가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고인의 고향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주민들은 영구차를 마을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동구 밖에 영구차를 세워놓고 관을 운구하게 되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둠침침해지더니 돌풍이 불면서 장대 같은 굵은 빗줄기가, 하늘이 열린 듯 엄청나게 쏟아지는 것이었다.
우산을 들었어도 바람에 뒤집혀서 제대로 쓸 수가 없으니 소용이 없었다.
관을 운구하는 사람들은 잰걸음으로 빗속을 나는 듯이 잘도 걸어갔다. 날씨가 좋았다면 고인의 노잣돈을 받아내기 위해 거북이보다 더 느린 걸음으로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며 늦장을 부리며 장난을 칠텐데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니까 상여꾼들이 쏜살같이 잘도 가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다 후련하였다.
우리 임원들은 무거운 성물 가방과 ‘상장예식서’가 든 가방을 들고 운구하는 일행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길이 아닌 풀숲을 헤쳐가며 꼬불꼬불 돌아서 가려니까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옷에 걸려 옷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인분과 거름이 덮힌 밭고랑에는 벌건 흙탕물이 도랑이 되어 흘러갔다. 벌건 진흙으로 이루어진 밭은 발목까지 푹푹 들어가 진흙에 박힌 신발이 잘 빠져나오지 않아, 신발이 벗겨지면 흙탕물에서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신이 벗어질까 봐, 발에 힘을 주면서 걸으니까 발이 몹시 피곤하였다. 그리고 인분이 덮인 똥 밭을 지나려니까 기분이 매우 찝찝했지만 그 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쏟아지는 폭우에 시뻘건 흙탕물이 철철 흘러가는데 어느 길이 진짜 도랑인지 밭고랑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도랑에 풍덩 빠질까 봐 마음 놓고 발을 내딛기가 두려웠다. 가까스로 현장에 도착하니 검은 정장의 바지는 온통 진흙투성이였고 온몸은 비를 맞아 겉옷은 물론이거니와 속옷 팬티까지 모두 흠뻑 젖어, 몸에 비누칠만 한다면 3년 묵은 때까지 힘없이 벗겨질 정도로 온몸이 젖어 있었고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상주들은 우리에게 매우 송구스러워하며 장례를 끝내고 돌아갈 때는 제대로 난 길로 질러서 갈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어휴, 다행이네!’ 하고 안심하였다. 도묘예절과 입관예절을 할 때는 다행으로 비가 멎어 우리는 무사히 예절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마을로 내려갈 때는 제대로 난 길로 질러서 가겠다고 하더니만 마을 주민들이 거부하여 온 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만 주저앉을 만큼이나 다리의 힘이 쭉 빠졌다. ‘어휴, 그 똥 밭을 또 어떻게 지나가지!’ 하며 걱정스러웠는데 우리 임원들은 아무 불평도 없이 오던 길을 조심스럽게 가는 모습들을 보고 나는 임원들이 모두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과 함께 봉사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마우며 감사하다.